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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2.14
제목 제2기40회 통일비전연구회 역사연구회



통일비전연구회 제2기 40회 역사연구회가 14일 통일비전연구회 연구실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이날 연구회는 최장현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학생이  한나 아렌트의 저서'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에 대한 독서발표 및 토론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참석자들은 아이히만의 사례를 통해 통일 이후 북한의 인권침해 가해자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 열띤 토론을 이어갔습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내용


나찌 경력
아이히만은 아버지의 친구인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의 소개로 1932년 오스트리아 나찌당에 가입하고 (당원번호 889,895) 친위대(Schutzstaffel, SS) 후보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친위대원 번호 45326으로 정식대원으로 살츠부르크에서 훈련을 받고 일반친위대원(Allgemeine SS)이 되었다.  1933년 나찌당이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하던 시절에 아이히만은 33년 8월부터 34년 9월까지 레히휄트와 다하우에서 ‘오스트리아 부대’로 훈련을 받았는데 관료주의와 군사훈련에 실증을 느껴 SS 보안국에 전출을 신청했다. 1934년 9월 나찌 내무부 SD의 프리메이슨 담당부서로 이속된 아이히만은 이곳에서 같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친구 레오폴드 폰 밀덴스타인 친위대 소위가 과장으로 있던 SD 베를린 총국의 유대 부서에 스카웃 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1934년 11월 베를린으로 옮긴 아이히만은 1935년 총분대장으로 승진하는 등 출세가도을 달리기 시작해 1937년에는 친위대 소위로 진급했다. 그 해에 아이히만은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주를 더욱 확대하기 위해 하이드리히의 허가를 받아 유대인 이주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영국령 팔레스타인 식민지에 파견되었다. 그는 카이로에서 유대인 민병조직 하가나 멤버들과 접촉해 이주에 관한 제반사항을 논의했으나 15 아랍 계 지도자들이 접촉을 거부하고 영국 식민성도 유대인 이주를 거부한데다 나찌 내부의 방침도 바뀌면서, 결국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이주시키는 문제는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빈과 프라하
1938년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합병되자 비엔나에 파견된 아이히만은 이곳에서 SS조직 구성에 공을 세워 친위대 중위로 승진했고 유대인 관리총국에서 오스트리아 내 유대인을 축출하는 ‘전문가’로 떠올랐다. 당시 아이히만은 오스트리아에서 망명을 원하는 유대인들의 재산을 전부 몰수하는 정책을 실시해 1938년 10월 21일의 보고서에서는 9월말까지 반년만에 5만명의 유대인을 추방했다고 적었다. 같은 시기의 독일에서 추방된 유대인 수가 19,000명이었다는 걸 고려하면 상당한 성과였다. 그와 함께 그의 근무 평점도 높아지면서 ‘남다른 협상능력, 화술, 조직력’이나 ‘정력적이고 기민한 활동이 두드러지며 관리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유대인 이주문제의 권위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헤르만 괴링(당시 명목상으로는 괴링이 유대인 문제의 총 책임자였다.)이 1939년 1월 설립한 베를린 내무부의 ‘유대인 이주 중앙본부’가 아이히만의 방침을 독일 전국에 확대하는 등 그 능력을 인정받은 아이히만은 1939년 3월 합병된 체코의 옛 수도 프라하에 파견되어 이곳에서 유대인 이주 총책임자가 되어 새로 조직을 구성했지만 이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2차대전
2차대전의 발발과 함께 친위대 대위로 진급한 그는 1939년 제국보안총국이 창설되자 베를린으로 돌아와 유대인 제거 전담인 제4과 국장이 되었다. 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면서 독일의 지배영역이 급격히 확대되자 독일의 지배영역내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수도 약 325만 명으로 급증해 그들의 처리 문제가 심각해지자 이듬해에는 마다가스카르 프로젝트(유대인을 마다가스카르로 전원 강제 이주시키는 계획)에 착수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1940년 말 SS 소령으로 진급한 아이히만은 1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중령으로 진급했는데 이 시기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독일 점령지역내의 유대인은 전원 살해하도록 지침을 내리면서 아이히만의 대유대인 방침도 ‘최종 해결’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1942년 1월 20일, 하이드리히는 아이히만에게 유럽 내 유대인의 제노사이드를 공식적으로 결정하게 될 ‘반제 회담’에 회의록 작성 담당 비서로 참석시켰다. 이 회담 이후에 그는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해결'의 수송부서 책임자가 되었으며 1942년 3월 6일과 10월 27일의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을 위한 부처간 회의’에서는 아이히만이 의장을 맡았다.


1942년 3월부터 절멸 수용소로 이송이 시작되자 그 프로젝트의 핵심이 된 아이히만은 유대인들을 점령지인 폴란드 내의 수용소로 이송하기 위한 모든 열차 운영권한을 이임 받아 국가 총력전 태세로 혼잡하던 독일에서 교통부와 절충해 열차를 확보하는 수완을 보이며 2년간 500만 명의 유대인을 기차로 날라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1944년 아이히만은 소련군이 도달하기 전, 독일이 점령중인 헝가리에 파견되어 유럽 유대인을 서구 연합국의 트럭 및 기타 물자들과 교환하기 위한 교섭에 착수했으나 긍정적인 답변을 받지 못하자 다시 유대인 제거에 착수해 불과 2달만에 147개의 열차를 동원해 약 43만 명의 헝가리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 가스실로 인도했다. 1945년 하인리히 히믈러가 유대인 학살을 중단하고 최종해결에 관련된 모든 증거물을 파괴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아이히만은 히믈러의 변심에 반발해 공식적인 명령을 무시하고 헝가리에서의 작업을 계속했다. 그와 함께 독일의 마지막 군사적 발악에 말려드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헝가리에 남아 무장친위대 지휘관으로 실전 지휘 임무도 맡았다.


종전 이후
1945년 독일의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소련군을 피해 헝가리에서 도주한 아이히만은 오스트리아로 옮겨 이곳에서 옛친구 에른스트 칼텐브루너를 만났으나, 칼텐브루너는 아이히만과 협조하기를 거부하고 연합군에 절멸 작전의 책임자로 그를 지목했다.
2차대전이 끝날 즈음에 아이히만은 미군에게 체포되었지만 '오토 에크만'이라는 가명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1946년 초 미군의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했다. 이후 독일 남부의 휴양지 뤼네부르크 히스의 작은 마을 알텐살츠코스에서 몇년간 은신해있던 아이히만은 1948년 아르헨티나 입국허가를 획득하는데 성공하고 도주의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1950년 초 이탈리아로 건너간 아이히만은 초창기의 추축국 전범들의 도주루트 개척자들 중 한명인 알로이스 후달 추기경과 친분이 있는 한 프란치스코 회 수도사의 도움으로 이곳에서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이름으로 난민자격을 취득했다. 이로써 아이히만은 '리카르도 클레멘트, 기술자' 앞으로 발행된 이탈리아 제네바 발행의 국제 적십자사 인도주의 여권을 취득하고 아르헨티나 비자를 얻었다.  1950년 7월 14일, 아르헨티나행 배에 승선한 아이히만은 이후 10년간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처에서 공장 관리자, 중견 수도공, 전문 토끼 생육가 등등 몇 가지 직업을 전전했다. 심지어 가족들도 아르헨티나로 불러들였다.

체포
건국 1년 뒤인 1949년, 이스라엘은 공식첩보부 모사드를 창립했는데 초창기 모사드의 주요 업무 중에는 나찌 전범을 추적해서 기소하는 것도 있었다. 1950년대에 수많은 유대인과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이 아이히만을 비롯한 악명 높은 나찌 전범들의 추적에 헌신하고 있었다.
아이히만의 정체를 밝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로타르 헤르만의 정보였다. 그는 유대민 이주자 출신 노동자로 다하우 수용소에서 아이히만이 감독관으로 근무하던 시절에 아이히만을 본적이 있었고 나중에 독일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헤르만은 1950년대부터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가족들과 함께 새 삶을 꾸리고 있었는데, 그의 딸인 실비아가 아이히만 가족과 친분을 갖게 되었고 클라우스 아이히만과 연애를 시작했다.

클라우스는 아버지가 나찌였으며 홀로코스트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었다. 1957년 헤르만은 독일의 전쟁범죄자들에 관한 기사를 읽다가 아이히만의 진정한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 곧 헤르만은 실비아에게 아이히만의 집에서 사실을 알아오게 했고 결국 아이히만 본인을 만날 수 있었다. 클라우스가 집에 없다는 걸 알고 그가 아버지를 확인하자 아이히만이 확인해 주었다. 헤르만은 즉시 헤센 서독 정부의 주 감독관이었던 프리츠 바우어와 접촉해 아이히만의 삶에 관한 상세 정보를 제공받았다. 헤르만은 이후 이스라엘 정보요원과 접촉해 이후 수년간에 걸쳐 아이히만에 대한 내용을 확인하고 그를 체포할 계획을 세웠다.


1959년 모사드는 아이히만이 부에노스 아리에스에서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지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정확한 위치 추적에 나섰다. 24 면밀한 조사 끝에 리카르도 클레멘트가 아돌프 아이히만이 확실하다고 결론을 내린 이스라엘측은 아이히만 체포를 위한 협력 작전을 승인하고 그를 전쟁범죄자 혐의로 예루살렘에 불러들이기로 결정한다. 모사드와 신베트의 협력 하에 이스라엘은 1960년 1월 내내 아이히만을 감시했으며 그가 3월 21일 25번째 결혼 기념일에 아내에게 꽃을 배달하는 것도 중요한 단서였다.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11일, 부에노스 아이레스 교외에서 모사드와 신베트 요원들에게 체포되었다. 25 아이히만의 정체를 확인한 1960년 4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한 모사드 요원들은 추가적인 관찰을 수행한 뒤, 일단의 요원들을 배치해 메르세데스 벤츠 공장에서 근무하던 아이히만이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모사드의 작전은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동안 아이히만을 체포한다는 것이었고 번호판을 위장한 지원 차량도 준비되었다. 그들로서는 아이히만이 사라지기 전에 체포할 수 있을지가 확실치 못했다.


아이히만이 집에 갈때 항상 이용하던 버스에서 아이히만이 보이지 않았을 때 계획은 거의 중지될 뻔 했다. 게다가 고장난 자동차를 수리하는 척 위장하고 있던 모사드 요원들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아서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다. 하지만 거의 30분이 지난 시점에 아이히만이 버스에서 내렸다. 모사드 정보요원이 그에게 접근해 스페인어로 잠시만 시간 좀 내주겠냐고 말했을 때 아이히만은 놀라서 도망치려 했지만 모사드는 그에게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비추었다. 모사드 요원 2명이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땅에 눕힌 뒤 자동차로 데려갔다. 차에서 그는 모사드 요원들에게 ‘나는 이미 내 운명을 받아들였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위조번호판으로 경찰의 검문을 피한 모사드 요원들은 아이히만을 안전 가옥까지 데려갔다. 그곳에서 아이히만은 의자에 묶이고 재갈을 풀린 채 심문을 받았다.


클레멘트가 아이히만이 확실하다는 결론이 내려지자 아이히만은 즉각 처형되던지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을지를 선택하도록 했다. 아이히만이 재판정에 서겠다고 하자 요원들은 안전가옥에 가둬둔 후 약을 투여하고 술에 취한 것처럼 꾸민 다음 승무원 복장을 입힌 그를 아르헨티나 독립기념일 행사에 참석했다가 귀국하는 이스라엘 정부관계자들을 귀국시키는 항공기에 태우고 1960년 5월 21일에 이스라엘로 데려오는데 성공했다. 


아이히만 재판
아이히만의 재판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 1961년 4월 11일, 예루살렘 지역법원에 선 아이히만은 15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었는데 그 내용은 인도에 대한 범죄, 전쟁 범죄, 유대인에 대한 범죄, 불법조직 가담죄 등을 포함했다. 이스라엘 형법에 의거해 재판에는 모쉐 란다우, 베냐민 할레비, 이즈하크 라베 이상 3명의 재판관이 배당되었다. 수석 검사는 이스라엘의 어토니 제네럴 기드온 하우즈너가 맡았다. 세명의 판사는 플레인 다이즈 위에 앉았다. 베트 하미쉬파트, (Beit Ha'am, 오늘날의 게라르드 베하르 센터. 예루살렘 번화가의 오디토리움) 히브리어로 ‘정의관’이라는 이름의 건물에서 재판이 시작되었고 아이히만은 희생자 가족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방탄유리로 둘러쌓인 피고석에 앉았다.


이 재판은 국제적으로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화제가 되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거의 제한없이 전세계에 재판과정을 언론매체들이 생방송할 수 있도록 허가랬다. 재판에는 수많은 증인들이 소환되면 시작되었는데, 증인들 중에는 아이히만이 절멸 캠프에 희생자들을 수송하는 과정에서 맡은 역할에 대한 증언을 할 홀로코스트 생존자도 있었다.  검사 측의 주요 증인 중 한명은 1945년 미군 장교였던 미국인 판사 마이클 A 무스마노였다 .무스마노는 뉘른베르크의 피고들을 심문했었고 나중에 펜실베니아 최고 법정에서 판사로 근무했다. 그는 말년의 헤르만 괴링이 ‘아이히만은  어떤 나라에 어떤 명령을 내려서건 유대인을 처형할 지를 결정할 권한이 있었다는 것이 명확하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검사측의 논고가 끝나고 아이히만의 변호인을 맡은 로베르트 세르바티우스와 디터 베흐텐브루흐는 왜 자신들이 검사측 증인에 대해서 반대심문을 진행하지 않는지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변론을 시작했다. 아이히만은 변호사들에게 자신은 홀로코스트 중에 일어난 사실들에 대해서 논쟁하지 않겠다고 의사를 밝현다. 재판중에 아이히만은 자신이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1945 ~ 1946 기간 동안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찌 전범들이 주장한 논지와 같았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거의 권한이 없는 ‘배달부’에 불과했다고 주장하면서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크건 작건 아돌프 히틀러나 그 외의 어떤 상급자의 지시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고 성실히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라 증언했다. 그에 대한 반대 심문에서 하우즈너 검사는 아이히만에게 스스로가 수백만 유대인의 사망에 죄책감을 느낀 적이 있는지를 질문했다. 그는 ‘법률적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인간적으로는 그렇다. 내가 그들을 수송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이 있다.’고 대답했다.


하우즈너는 그에 대해 아이히만 본인이 1945년에 말한 내용을 증거로 제시했는데 그것은 ‘나는 웃으며 죽을 수 있다. 내가 5백만명의 인간을 마음대로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만족감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는 내용이었다. 그에 대하여 아이히만은 자신은 오직 ‘제3제국의 적’들만을 언급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변호사측 증인은 대부분 전 나찌 고위 관료들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재판에 대한 증언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면책 및 안전을 보장받은 이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 입국을 거부했지만 대신 법원 데포지션을 보냈다.

그들 중 누구도 아이히만이 주장한 ‘명령을 따랐다’는 주장을 지지해주지는 못했다. 다만, 1944년 부다페스트의 SS 경찰 지휘관이었던 오토 윙켈만의 증언에서 그는, ‘아이히만은 타고난 2인자로 자신의 권력을 책임감이나 도덕적 후회 없이 휘두르는 사람이다. 자신이 히틀러의 뜻에 따라 행동하기만 하면 권한을 넘어서도 된다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이후 14주 동안 1,500건 이상의 문서와 100여명의 증인(90명은 나찌 수용소의 생존자들이었다.)과 약 16개국에서 외교 루트를 통해 보내진 수십여명의 증언들을 검토한 끝에 아이히만 재판은 8월 14일에 끝났다.

변호: 국가행위의 문제
아이히만의 변호인단은 피고의 과거 행동을 ‘국가행위’라고 주장하고 있었으며 아이히만 같은 사람은 언제든지 다시 나타날 수 있을 것으로 독일정부가 이스라엘 법정에 포기하고 국제법에 반해 처벌되는 ‘명백한 희생양’이라고 주장했다. 아이히만 본인도 자신은 ‘언제나 진실을 말하려 하였으나 재판부가 그를 믿지 않았으며 자신은 결코 유대인 증오자가 아니라’고 변명하였다. ‘자신의 죄는 의무이행에서 온 것이고 복종은 미덕으로 칭송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지배써클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희생자이며 지도자만이 처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뉘른베르크 재판이 인정하는 것처럼 국가대표가 보호되는 일정한 국제법상의 규칙들은 국제법상 범죄로서 비난받는 행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명백히 나찌 독일은 그 ‘국가행위’로 수행한 모든 범죄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지만 그로 인해 피고의 개인적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뉘른베르크 재판 및 1946년 12월 11일 유엔총회 결의에 의해서 인정된 국제법상의 원칙이라는 이유로 이 또한 인정되지 않았다.

판결
이 시점에서 재판관들은 조용히 심의를 진행하고 12월 11일, 세명의 재판관은 판결을 내렸다. : 아이히만에 대한 모든 기소 내용에 유죄를 판결한다. 비록 1941년 히틀러의 명령을 통고받기 전의 모든 죄에 대해서는 ‘유대 민족을 말살하기 위한 고의가 없다’는 이유에서 비록 비인도적인 범죄 또는 통상적 범죄가 될 지언정 한 민족에 대한 절멸적 의도를 담고있는 범죄가 아니라는 점에서 전부 무죄가 선고되었으나 41년 이후엔 아래의 항목을 범죄로 저질렀다고 판결한다.

- 수백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도록 지시하고 
- 수백만명의 유대인을 육체적 파멸로 이어지는 조건에서 생활하도록 하고 
- 그들에게 육체적, 정신적으로 심각한 위해를 가하고 
- 유대인 여성의 출산을 금지하고 임신을 중절시켰다

이 선고공판은 2일에 걸쳐서 약 244개 부분으로 나뉘어진 판결문을 3명의 재판관이 낭독하는 절차가 이어졌고 아이히만은 이 시점에서 자신이 사형을 언도받으리라 예상했다. 37 12월 15일, 법원은 예상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아이히만은 이스라엘 재판부의 법률적 판단과 자신이 기소된 법률의 정당성에 대해서 항의했으며 자신이 ‘불소급의 원칙’에 의해 보호받아야 하고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변론을 거듭했다.
항소를 받은 이스라엘 대법원은 똑같은 공방을 되풀이 한 다음 1962년 5월 29일, 피고의 항소를 거절하고 모든 항목에서 원심판결을 인용하면서 다만,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주장에 대해 ‘아이히만은 자신보다 상급자의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자신의 상급자로 유대인 문제 – 이른바 최종해결 - 에 관련된 모든 명령을 지시했음’을 지적하면서 '아이히만이 아니었더라도 사태는 호전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변호인단의 주장에 대하여 ‘수백만명의 유대인을 고문하고 피부를 벗겨내는 지옥보다 끔찍한 만행은 아이히만과 그 부하들의 광신적인 열기와 피에 대한 끝없는 갈망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선고했다.


같은날 히브리 대학의 마르틴 뷔버를 포함한 수많은 유명인들과 아이히만의 처와 자식들이 제출한 탄원서가 이스라엘 대통령에게 전달되었으나 38 5월 31일, 이즈하크 벤 즈바이는 아이히만에 대한 사면요청을 모두 거절했다. 아이히만의 아내 베라가 보낸 사면요청에 대해서 벤 즈바이는 구약성서를 인용해 ‘너의 칼이 많은 어머니들의 자식을 잃게했으니 너의 어머니 또한 자식을 잃은 여자가 될 것이라.’는 말을 친필로 적어 보냈다. (사무엘 상 15:33) 


아이히만은 1962년 5월 31일, 라믈라의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일반적으로 사형 선고를 하지 않는 방침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에서 유일하게 사형이 집행된 사건으로, 아이히만은 마지막 식사를 거부하고 대신에 이스라엘 산 적포도주 카르멜을 반병 정도 마셨다. 또, 사형집행 전에 전통적으로 입히는 검은 두건도 거부했다.

아이히만의 행동에 대한 해석
히틀러가 독일에서 집권한 뒤 독일을 벗어난 정치 이론가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에 관한 내용을 뉴요커 지에 기재하고 이를 토대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출판하면서 유명해졌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반유대적인 성향이나 심리학적인 문제없이 단순히 성공적인 경력을 쌓기 위해 그 모든 학살을 수행했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아이히만이 재판에서 증오감이나 죄책감 보다는 평범하고 소시민적인 성격을 보여준 것은 그의 ‘전형적인 평범한 악인’의 성향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그녀는 이것이 나찌 범죄자들이 특이한 사이코패스라거나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르다는 생각의 신빙성을 두드러지게 낮추는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이 책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던지 다른 누구라도 그의 직책을 맡았다면 똑같은 일을 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도덕적 책임감을 무시한 것은 자율성에 의거한 것이며 아이히만은 자신이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며 그는 ‘관료제’의 책무를 존중했을 뿐이라고 주장했으나 바꾸어 말하자면 그는 명령에서 의문을 품지 않았다는 자체가 도덕에서 눈을 돌려버린 것이라고 보았다. 아이히만의 문제는 과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아이히만의 후예이며 최소한 아이히만 적 세계의 후예이다. 우리는 조직 속에서 무책임한 톱니바퀴처럼 작동하고 있으며 도덕성이 조직에 대항하지 못한다면 모두가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 철학자 귄터 안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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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46 통일을 준비하는 청소년 아카데미 제3기 1회 행사 관리자 2015.5.09
45 제3기 3회 통일비전연구회 역사연구회 관리자 2015.4.11
44 제3기 1회 통일비전연구회 역사연구회 관리자 2015.3.14
-> 제2기40회 통일비전연구회 역사연구회 관리자 2015.2.14
42 2015년 통일 맞이 신년 스키캠프 관리자 2014.1.17~18
41 2014년 하계 통일비전캠프 관리자 2014.8.15
40 제7회 남북대학생 및 청소년 통일인문학 아카데미 관리자 2014.11.22
39 제6회 남북대학생 및 청소년 통일인문학 아카데미 관리자 2014.10.25
38 제5회 남북대학생 및 청소년 통일인문학 아카데미 관리자 2014.9.27
37 제4회 남북대학생 및 청소년 통일인문학 아카데미 관리자 2014.8.9
36 제3회 남북대학생 및 청소년 통일인문학 아카데미 관리자 2014.7.12
35 제2회 남북대학생 및 청소년 통일인문학 아카데미 관리자 2014.6.28
34 제1회 남북대학생 및 청소년 통일인문학 아카데미 관리자 2014.5.24
33 남북관계와 청소년 통일의식 문제 세미나 관리자 2014-05-10
32 통일의 상상력과 청소년의 역할 관리자 201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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